"얘가 말하는 녹색 광선이란 게 뭐지?" 샘이 물었다.

"걔는 왜 그 광선이 보고 싶다는 거지?" 시브가 답했다.

왜냐고? 곧 알게 될 것이다. (소설 <녹색 광선> 중)



1.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 Le Rayon vert>(1882)과의 인연은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을 본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씨네필이 애정을 표해 마지않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대를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시종일관 예민하고 방어적인 델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지만 무언가 좋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습니다. 다만 마음을 열고 맞이하는 엔딩 장면이 주는 탁 트이는 기분이 마음에 오래 남아있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면 곧장 가까운 종로3가 알라딘이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그 영화에 대한 책이나 OST를 찾아보곤 합니다. 운이 좋으면 방금전에 본 영화의 OST나 원작소설, 비평서를 통해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거나 영화의 감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녹색 광선>을 보고 나와서 에릭 로메르와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언급되는 쥘 베른의 <녹색 광선>이라는 소설이 궁금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저와 같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녹색 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로멘틱한 전설이 익히 알고 있는 모험 SF작가 쥘 베른을 만나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을까 궁금했습니다. <녹색 광선> 책을 들고 영화 속 바캉스 시즌의 파리로 들어가 델핀과 나란히 걸으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 <녹색 광선>의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2. 

 다시 <녹색 광선>을 떠올리게 된 것은 2013년 여름 휴가를 준비하면서 였습니다. 여전히 원작소설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영화를 몇 번 더 보게 되면서 델핀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2011년 여름 [딴짓의 세상]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출판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번역해 발간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오래 머물면서 점점 커졌고, 어느새 언젠가는 해 보고 싶은 작업이 되었습니다. 너무 막연한 일이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3.

 2014년 늦봄, 환경영화제에서 봤던 <킹 오브 썸머 The Kings of Summer>(링크)를 보고 이 영화를 곧장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장영화거든요. 네, 저는 성장영화 팬진 <THE SUMMER>를 만들고 있습니다. 수입과 개봉을 촉구하는 트위터 1인 홍보를 이어갔으나 개봉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영업.jpg


 그리고 1년이 지나 2015년, <킹 오브 썸머>의 주연 닉 로빈슨이 출연한 <쥬라기 월드>가 흥행하면서 <킹 오브 썸머>의 개봉소식이 들렸습니다. 불길했죠. 뒤늦게 흥행작에 출연한 배우의 지난 영화가 개봉될 예정이다... 기사는 뜨지만 예매는 뜨지 않는다... 포스터에 제목은 유달리 크게 보이고 개봉월 표기는 있지만 개봉일은 없다... 네 그렇습니다, IPTV 개봉... <킹 오브 썸머>는 그렇게 <쥬라기 월드>의 주연배우의 영화!라고 홍보되며 안방극장(?!)으로 직행했습니다. (IPTV로 배급되는 걸 개봉이라고 표현하는 건 법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녹색 광선>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죠. 여기까진 그렇습니다. 문제는 <킹 오브 썸머>의 국내 포스터에 들어간 레터링이 프로파간다에서 디자인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레터링을 그대로 트레이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혼자 망상처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 영화가 수입돼서~ 내가 좋아하는 프로파간다에 포스터 디자인을 하고~ 상상마당 같은 극장에서 틀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그런 계획을 발표하거나 추진한 적이 없지만... 뇌내망상이 참 무섭습니다.. 그러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레터링을 어설프게 베낀 못생긴 포스터 발견했고 (조금 우습지만)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저 영화를 살껄, 작은 영화는 아주 비싸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은데, 개봉할 돈이 없으면 그냥 사두기만 해서 아무도 망치지 못하게 할 걸, 그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럴만한 돈이 전-혀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만큼 화가 나고 괜히 영화에 미안해지기까지 했습니다.




5. 

그리고 <녹색 광선>이 떠올랐습니다. 누가 번역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저기 이야기하고 다닌게 벌써 몇 년째 입니다. 읽고 싶은 책을, 보고 싶은 영화를 누군가가 눈 앞에 가져다 주길 바라지만, 현실은 그 작업이 망쳐지지나 않으면 다행인걸요. <킹 오브 썸머> 포스터 사태에 며칠을 분개하다가 다짐했습니다. 그래. <녹색 광선>을 만들어보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그냥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아무도 만들어 주지 않아. 대신 잘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때는 이 작업의 규모나 넘어야 할 산을 채 짐작하지도 못했습니다.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어떤 작품은 그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기 적당한 시기가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소설 [데미안]은 적절한 시기에 왔고 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렇지 못했다. (두 작품 모두 고등학교 시기에 만났다.) 이런 관점을 성장영화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두 시기에 만났다. 한번은 초등학생 때었다. 학기 말에 수업 진도가 다 끝난 뒤 교실에서 본 것 같은데 영화가 슬펐고 학교란 답답한 곳이구나 정도의 감흥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두 번째 관람은 대학원 1학기 기숙사 방에서였다. 그렇게 두 번의 관람은 영화 속의 인물과 내가 같은 나이와 눈높이에서 강하게 공명할 수 있는, 고교 시절을 모두 피해서 찾아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의 위험함을 알고 있다. 괴로웠던 시간이 성취의 근거로 그려질 때 ‘그때가 좋았지’라는 맥없는 이야기로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한없이 어둡고 힘들었던 시간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해 보자면, 나는 심화된 수학, 과학을 가르치는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나왔다. 모두가 학업에 욕심이 있는 우수한 학생들이지만 1등부터 꼴등이 메겨질 수밖에 없었고, 함께 기숙사에서 살면서 인생의 친구들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들로부터 상처도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감정과 상황이 한꺼번에 가능했다는 걸 지금에 와서 깨달으면서 새삼 놀라기도 한다. 나는 그 치열한 학교에서 하위권을 맴돌면서 수학 과학보다는 영화와 미술을 좋아하는 열등생이었고, 그러면서도 자를 대고서야 서문을 찢어낼 수 있는 제도권 내의 학생이었다.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봤더라면 어땠을까. 영화가 나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과도하게 이입하고 혼자 저만치 달려갔을 것 같다. 실제로 나의 고교생활의 많은 면이 영화 속 웰튼 아카데미의 그것과 닮아 있었으므로. 키팅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가 나를 향하는 것 같아서 시인 혹은 예술을 하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 순식간에 뜨거워졌다가 재능과 현실, 나태함을 확인하고 또 순식간에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제작년에 두 번째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날을 이야기하고 싶다. 시나리오 작성과 관련된 참고도서를 읽다가 예시로 언급된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져서 아무 생각 없이 기숙사에서 영화를 틀었다. 그 날 룸메이트가 방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록 꺼억꺼억 울면서,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는가 싶어서 당황했다. 


입시를 끝낸 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울었던 까닭은 나의 고교 시절과 영화를 겹쳐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영화가 생생하게 그려낸 성장의 한 순간과 강렬한 감정들로 인해 오히려 ‘청소년기에 맞는, 청소년을 위한’ 영화로 오해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의 주제는 청소년기에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좌절과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도 책상 위에 올라설 수 있는가 까지 나아간다. 심지어, 그런 메세지를 던지는 키팅 선생마저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는 그 나름대로 성장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이켜보면 나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찾아온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다 잊어버렸을 때, 영화는 한 번 더 공명한다. 그래서 당신이 청소년인지 중년인지, 얼마나 짧고 긴 삶을 살았던지와 관계없이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권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이 글은 <THE SUMMER> 02 "죽은 시인의 사회" 편에 실렸으며, 로빈 윌리엄스 추모 2주기를 맞아 포스팅합니다.







신고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