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행복은 녹색 광선을 관찰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 같아….” (소설 <녹색 광선> 중)




1.

 <녹색 광선>은 먼저 책을 읽고 번역을 결정했다거나, 한 작가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온 출판사의 라인업 상에서 발간되는 일반적인 번역서와는 다른 기획을 거쳤다. 요약하자면, 영화 <녹색 광선>을 보고 영화의 모티브로 등장한 동명의 소설에 대해 검색하다가 어느새 책 발간 소식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번역서라면 출판사 내, 외부의 전문가가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지금 한국에서 소개할만한 내용인지, 작품성과 시장성을 가지는지 전문가의 노하우로 평가하고, 예측을 토대로 출간 여부와 규모를 결정한다(고 알고 있다). 내용이 좋아도 제작비가 회수될 수 없는 책이라면 계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출간도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하루키라거나..)


<녹색 광선> 번역서 발간을 고민하던 때에 원고 검토를 요청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만약 검토 결과 ① 재미가 없습니다, 라거나 ② 시장성이 없습니다, 라는 답이 오면 어떻게 될까?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굳이 번역할 필요도 없겠네요. 덕분에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졌습니다.'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윤이나 작품의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산업적인 판단 밖에서 '읽어보기도 전에' 매혹당한 책이기 때문에, 검토한다고 해서 그 결과에 따라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쓰여진 800매 분량의 소설임을 고려한다면 매우 무모한 결정임이 분명하지만, 다행히 번역을 마치고 읽어 본 <녹색 광선>은 재미있으면서도 로멘틱 한 책이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배우 김혜수의 취미생활에 대한 인터뷰가 화제였다. 

“예를 들어 어떤 작가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의 책에 꽂혔다면 저는 그 작가가 쓴 책을 전부 사서 읽어요. 국내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책이라면 해외 온라인 사이트에서 직접 구매해요. 그러곤 따로 번역을 맡겨서 받아 읽죠." (인터뷰 링크)

그렇구나. 잠시나마 김혜수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님) 



2.

영화가 현실과 접점을 만들어 내는 지점을 발견하면 묘한 감동을 받는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촬영지를 방문해서 영화에서 주인공이 앉았던 곳에 나도 앉아보고, 그들이 탐닉했던 책이나 음반을 구입하기도 한다.


성장영화 팬진 <THE SUMMER>를 만들면서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찢어버리라고 했던 서문을 찾아 논문 사이트를 헤매거나, <파수꾼>에 등장했던 세 친구의 행복한 바닷가 사진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연락했다. 그 과정을 몇 달이고 반복하다 보면 지금 나와 같은 세상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의 흔적을 찾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서문은 작가가 영화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구의 것이라서 아쉬웠지만, <파수꾼>의 사진을 결국 손에 넣었을 때는 기뻐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심지어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수백 장의 다른 바닷가 사진도 모두 보내주셔서 꼼꼼한 편집 사이로 영화의 세계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영화에서 봤던 찢어진 페이지나 인화 사진을 우연히 발견할 때, 영화가 영화로 머물지 않고 내가 사는 세상과 겹쳐진다.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스크린 너머의 세계로 진입하는 마법 같은 순간이다.



4. 

독립출판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2011년에 처음 작업을 할 때는 '독립'이라는 표현이 부담스러워서 '소규모 자가출판'이라고 불렀다. 그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독립출판'을 사용하면서 나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요즈음 <녹색 광선> 작업을 하면서 '취미출판'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대안 형태의 출판사로 목표에 맞는 단행본을 발간하는 것도 아닌... 게다가 애초에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우면서도 읽고 싶은 책을 직접 만들어서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면 그건 '독립'보다는 '취미'가 더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표현에 들어있는 가벼운 뉘앙스가 이 책의 출간 결심에는 더 적확하기도 하고. 그러나 돈이 많아서 한다는 뉘앙스는 쫙- 빼줘야 한다. 조금씩 돈을 모아 책을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몹시 가난하지만 동시에 몹시 사치스러운 작업이다.



5.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독립출판' 씬에서(혹은 '취미출판' 씬에서) 공명할 독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에릭 로메르의 팬인 영화 관객일 수도 있고, 쥘 베른 혹은 SF 모험소설의 독자일 수도 있다. 그 집단의 교집합이 어느 정도 일지, 그리고 '독립출판' 씬과는 어느 정도 겹쳐져 있는지는 모호하지만... 그런 독자를 위한 책이 만들어지는 것 역시 '독립출판'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라건대, 누군가에게는 영화와 현실이, 1882년과 현재가 신비롭게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재미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느낌으로 다가가면 분명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 <녹색 광선> 텀블벅이 곧 오픈됩니다. 후원해주신 분께 제공되는 선물부터 책과 연계해서 만든 굿즈까지, 이 독특한 소설이 조금 더 풍성하고 매력적인 맥락에서 다가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곧 소식 전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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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29 23:5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5beom 2016.09.30 03:55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제가 (모르긴 몰라도) 한 분 웃겼군요! 만족하며 마이크 드랍...ㅎㅎ 즐겁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비현실적인 상상력으로 보면 그 사건은 소설의 시작이었다. (소설 <녹색 광선> 중)





나의 독립출판 입문기


* 이 글은 <녹색 광선>의 번역자 박아르마 선생님이 지난 3월 14일 "교수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 출처(링크)




외국문학 전공자로서 번역을 거쳐 책을 출간하는 일이 있다 보니 출판사 편집자들과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번역을 처음 시작한 20여 년 전에도 출판시장은 어려웠고 지금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늘 불황이라는 출판시장이지만 올해는 더 어렵다는 말을 편집자들로부터 듣고 있다. 과거에는 번역자로서 출판사에 좋은 책을 소개해 출간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요즘은 출판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고심 끝에 출간을 결정한 책을 번역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가깝게 지내는 중견 소설가에게도 책을 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원하는 책을 내기 어려운 이유를 편집자의 혜안 부족이나 출판사의 소극적 경영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번역자로서 인문학 영역에 속하고 지나치게 실용성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면 출판사의 번역 제안에 대부분 응하는 편이다.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이름이 상당히 알려진 번역자들 중에는 작은 규모의 출판사에서 온 번역 제의를 별로 친절하지 않게 거절하는 경우가 꽤 있다. 저자나 책의 내용이 출판사의 규모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런 경우 시간만 허락한다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문화기술대학원에 다니는 대학원생으로부터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소설 『녹색 광선』을 독립출판 형식으로 출간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다. 처음에는 번역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판단 자체가 어려웠다. 그 이유는 독립출판이 무엇인지조차 몰랐고 물어물어 그러한 출판 형태에 대해 알고 나서는 출판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학원생에게 번역료를 받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독립출판은 한 마디로 책의 기획과 편집, 디자인, 인쇄, 유통까지도 1인이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해 책을 출간하는 출판의 형태이다. 물론 몇 가지 과정은 전문가에게 의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독립출판의 장점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우선 출판사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주제, 구성, 디자인에 제약이 없이 모든 콘텐츠를 책으로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책의 인쇄와 유통 과정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다. 책의 유통은 독립출판을 시작한 사람들의 최대 어려움일 수 있지만 전국에 있는 독립출판 전문서점에 저자 혹은 기획자로서 직접 찾아가 현장의 반응을 살피고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독립출판물을 비롯한 예술작품 등을 사고파는 플리마켓(flea market)에서 책을 유통하는 일도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직접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독립출판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출판비용 문제다. 독립 출판물들의 내용이 대개 여행, 가족사, 취미, 일상 등 출판을 하려는 저자 개인의 관심사와 관련된 것이 많기 때문에 저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출판을 통해 큰 수익을 올릴 것이 아니라면 책을 소량으로 출간해 소수의 독자들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큰 기획이 필요한 작업이라면 ‘대중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의 한 유형인 텀블벅(tumblbug)을 통해 소요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독립출판을 통해 책을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고 생각해보니 나도 이미 유사한 작업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학위 논문을 출간할 때 온라인으로 원고를 보내고 원하는 수량을 자택에서 받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드렸으니 말이다. 이른바 ‘주문형소량책출판(POD: Publish On Demand)’도 독립출판이 활성화되기 전에 있었던 개인 저작물 출판의 한 형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독립출판에 관심을 갖게 된 뒤로 지역에 있는 독립출판 전문서점을 가끔 찾게 됐다. 대개 독립출판 전문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니라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공간 역할도 겸하고 있다. 책을 출간하려는 사람에게는 출판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최근에 종로구 익선동의 한옥 마을을 찾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의 한옥집을 개조해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혹은 사업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들도 오래된 한옥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젊은이들처럼 아날로그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디밴드는 가요계의 2군’이 아니듯이 독립출판을 하는 사람들의 목표 역시 베스트셀러에 대한 꿈은 아닐 것이다. 쥘 베른의 『녹색 광선』이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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