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처음으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참여하고 나서의 흥분이 기억납니다. 많은 분이 와 주셨고, 책을 봐 주셨고,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옆에 앉은 셀러들과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작년의 후기(링크)를 보면 이 친구 정말 신 났구나! 라는 게 느껴집니다. 올해는 두 번째 참가라서 (혹은 부스를 찾아주시는 관객/독자분이 적어서 시간이 많이 나서 그런지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옆 테이블에 있었던 <월간잉여> 잉집장님은 '나 늙어 보임?' 같은 질문을 하시다가 또 뜬금없이 '독립출판이라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시곤 했습니다.


 먼저 아래의 후기는 개인의 아주 주관적인(혹은 자기방어적인) 해석입니다. 이를테면 이 책이 왜 안 팔리느냐, 그건 이 책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거나 재미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하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기 쉽고 눈에 들어오는 몇 가지 이유를 제멋대로 조립합니다. 즉 어떤 논리로 쌓아올린 생각들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에게 무례하게 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둘째로 [딴짓의 세상]은 독립 잡지나 연속적인 간행물로 팬층을 누적하는 작업자가 아닙니다. 개인 작업자는 디자인 스튜디오나 독립잡지, 일러스트레이터/페인터처럼 어떤 경향으로 묶어서 설명할 수 있거나, 일관된 형태의 작업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제작자와는 관객/독자와 만나는 지점이 일단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 토요일과 일요일의 미묘한 공기

 토요일과 일요일을 비교해 보면, 책을 구경하시는 분과 구매하시는 분은 일요일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토요일 - 특히 오픈 되자마자 - 은 '팬으로 지켜보고 있는 특정 부스나 특정 작업물'을 보러 오시는 분들이 많고(그래서 다들 지나쳐 가시고ㅠ), 이틀째 혹은 오픈 시간이 지나면서는 행사 자체나 독립출판물에 대한 포괄적인 관심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많아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입니다. 하루를 경험하면서 책을 더 능숙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걸 수도 있고, 몇 가지 변경한 배치와 인쇄물이 관심을 더 끌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설명이 필요한 책, 설명이 가능한 공간에서 잘 팔리는 책 

 <31days 807.3km>의 원본 다이어리를 이번에 처음 가져갔는데, 이걸 펼쳐놓는 것만으로 많은 분이 관심을 보이시고 (때로는 책보다도 더) 즐겁게 봐 주셨습니다. 어떤 의도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책이라는 걸 설명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책을 보거나 사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습니다. 책이라는 게 외적인 설명이 있어야 설득할 수 있다면 잘 못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해 봤고, 행사의 들뜬 분위기에서는 차분하게 처음부터 읽어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벌어지는 격차라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잡지나 연속간행물이 아닌 독립출판물은 '누가, 왜, 이렇게 만든 책인가'라는 기본적인 정보 없이 접하게 되는데 그것들이 직관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 책을 탐색하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확 떨어집니다. 그런 이유에서 <31days 807.3km>는 만든 사람이 바로 앞에서 설명해 주는 마켓에서 잘 팔리는 것 같고요. 반대로 마켓에서 구입해서 집에 간 뒤에도(=마켓이라는 흥분이 사라진 공간/시간에서도) 이 책을 적극적으로 읽어보실까, 라는 궁금증도 늘 가지고 있습니다.


# 한눈에 집어드는 책, 만져보기 싫은 책

 책을 보는 분들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씩 다 집어 들고 읽어보시는 분, 고개를 빼 들고 눈으로만 훑어보시는 분, 개중에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결정해 집어 보는 분 등등... <ICELAND TRAVEL>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집어들어 책을 구경하는 비율이 높았는데 아이슬란드라는 미지의 공간이 주는 호기심과 함께 호감 가는 사진의 표지가 가진 책의 접근성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반면에 <31days 807.3km>나 <THE SUMMER> 01호 같은 책의 표지는 어둡고 시각적인 호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혹은 이끌어 낼 생각이 없었던) 책들이라 눈으로 구경하다가 집어드는 비율이 낮았던 것 같습니다.

 독립출판은 만드는 사람의 취향이나 주관이 더 전면에 나서는 형태면서도, 마케팅 등 책을 견인하는 부분이 적다 보니 책의 이미지 - 극단적으로는 표지 - 자체에서 주는 친화력이나 센스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업자에 따라서는 오히려 더 안전하게, 대중적인 이미지로 풀게 되는... 쪽으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독자 입장에서는 아주 아티스틱하거나, 아주 기괴한... '독립출판물은 이래야지.'라는 특이함을 만족시키거나, '아 정말 (눈에 편하게) 예쁘네'라는 책이 아니고서야 복잡하고 볼 것 많은 마켓에서 굳이 그걸 집어 들어 볼 이유가 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 일관된 스토리텔링

 이번에는 매력적인 두 매거진 <월간잉여><디어 매거진> 사이에 배정되었습니다. 양쪽의 테이블을 보고, 나의 테이블을 보고, 양쪽에서 하는 설명을 듣고, 내가 하는 말을 곱씹어 보면서, 하나의 부스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게 관객/독자에게 얼마나 편리한가를 깨달았습니다. 여기는 잉여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스구나, 여기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구나, 라고 했을 때의 거리감과 여기서는 다양한 개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을 때의 거리감. 여행기도 아니고, 사진 작업도 아니고, 글을 엮는 것도 아닌. 물론 그때그때 내키는 것들을 가능한 수준에서 만드는 게 [딴짓의 세상]의 처음 의도이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로 결과물들을 균질화할 생각은 없지만, 작업이 늘어날수록 오시는 분들에게는 헷갈리는 부스로 기억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만 결과물을 늘어놓고 보니, [딴짓의 세상]의 책들은 생각보다 친절하거나,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지지도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마켓과는 어울리지 않는 책

 마켓이라는 특성, 창작자의 극단적인 개성을 보고 놀라고 싶어하는 관객의 자세라는 측면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과 어울리는 책,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책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눈을 잡아채고 구매를 결정해야 한다면, 개성의 극단으로 갈수록 환영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진과 일러스트.. 아무튼 이미지 중심으로 가고 있지 않을까요. 행사 전체적으로 무엇이 많이 팔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얇은 종이들, 엽서, 책이 아닌 것들, 에코백, 배지, 작품들, 시각정보들이 전면에 나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기타는 왜 들고 다녀?>의 경우 온전한 텍스트 중심의 책을 (그것도 엄청 무거운데) 재미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구매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을 권하면서도 이런 환경에서 이런 책을 권하는 것은 막무가내라는 느낌을 (제 스스로) 받았습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텍스트 중심 결과물의 매출이 얼마나 될까도 궁금했고, 모두가 조금씩 이 행사의 이런 특성에 영향을 받는다면 조금씩 마켓의 성격이 이동하는 걸까 가까운 미래의 변화도 궁금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도나기 프로젝트> 역시 언리미티드 에디션과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마켓에서 누군가에게 판매되기를 원하는 책이 아니라 서점의 구석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 책이라는 걸, 누군가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은 책이라는 걸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소규모출판물 소개서 <뭍>의 소개에 보면 '가령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되기를 원하고 있을수도 있고 그러한 의도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바 입니다.'라는 말(링크)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글을 봤을 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도나기 프로젝트>를 만들면서야 모든 책이 판매와 매출을 위해 제작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 언리미티드 에디션

 2012년의 언리미티드 에디션 [딴짓의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판매한 책은 <ICELAND TRAVEL>인데, 행사일 기준으로 이 책은 나온 지 1년 반이 지났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재고가 거의 소진된 시점이었고, 소개된 지 시간이 오래 지난 지라 이제는 사실 분이 있겠나 생각했는데 뜻밖에 제일 많이 팔려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올해 가장 많이 판매한 <31days 807.3km>역시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첫선을 보였으니 책이 나온 지 1년이 지났구요. 그러다 보니 이 행사에 오시는 분들이 지속해서 독립출판 서점을 찾고, 혹은 자신이 만난 부스의 작업자를 계속 지켜보고 있으신 건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사에 온 이 관객들을 독립출판의 소비자라고 단정하기에는 허수가 상당하리라 생각합니다. (필름2.0의 글 한 꼭지가 생각납니다. (필름2.0은 아카이빙이 안 되어 있어서 예전에 제가 갈무리해둔 글을 따로 링크합니다.)) 행사가 어떤 시너지를 가져올지, 독립출판 씬에 대한 커다란 고민은 주최 측이나 몇몇 구심점이 되는 공간에서 충분히 하고 계실 테고, 개인 창작자일 뿐인 저에게는 주제넘은 생각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에너지가 일 년에 이틀을 제외한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보다도 저에게 강렬하게 다가온 고민과 생각은, 올해 토크를 하셨던 박해천 교수님의 글이 불러일으키는 파장이었습니다. (전문 링크) '과연 이 행사의 참여자들은 호황기에 ‘문화의 산업화’에 성공해 지금은 홍대 앞 건물주로 변모한 기성세대의 일부 문화 자본들,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 성공 덕분에 자율성의 제도 내부에 제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여타의 문화 생산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소소하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비관적인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행사의 참여자들은 종국에는 임대료만 올려놓고 사라지는 상권 재활성화의 촉매제이자 문화적 화전민으로 전락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왜냐면 그들이 사라지면 이 도시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은 비용 지불 능력과 회전율로 측정되는 ‘고객님’의 자리뿐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독자로서, 그들이 좀 더 큰 야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는 교수님의 글을 보면서 뭔가를 팔아낸다며 신나기 전에 한 세대의 구성원으로 진짜 고민해야 하는 본질적인 것들을 생각해봅니다.




 

 


 [딴짓의 세상]은 5회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성장영화팬진 <THE SUMMER> 01호와 <기타는 왜 들고 다녀>, <31days 807.3km>, <나무에 죄짓지 마세요>(기왜다 후원 부록, 한정판매), <도나기 프로젝트>(한정판매)를 가져갔습니다. 재고가 없는 <ICELAND TRAVEL>은 샘플을 가져갔고 친구들의 작업인 투개월 다이어리(링크)앞가방치마 Asack(링크)도 가져갔습니다. 그 사이 이렇게 결과물이 많아졌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렇게 오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내년에도 작업을 이어가서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언리미티드 행사에서 만나고 인사드린 관객/독자분, 창작자분 모두 반가웠습니다. 무엇보다 고생하신 스탭 분들과 행사를 주최하신 유어마인드 수고하셨습니다.


http://unlimited-ed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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