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제 21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기념품 프로젝트 "BIFFxMAKERS"(링크) 의 일환으로 샵메이커즈와 함께 제작한 동명의 소책자에 수록된 에세이 입니다.





2014년 한 해동안 전세계에서 만들어진 장편영화가 7309편이었다고 한다. 이중 2/3가 인도영화라고 하니, 계산의 편의를 위해 1시간짜리 영화라고 가정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평균을 너무 작게 잡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2014년에 제작된 영화를 모두 보기 위해선 7309 시간, 즉 304일 하고 반나절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는 10개월 동안 다시 6000여 편의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 계산은 산업적인 통계에 잡힌 장편 영화의 수치에 한정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016년 현재 7명의 프로그래머가 지역과 섹션을 나누어 전 세계의 영화를 살펴보고 주목할 만한 신작을 골라 영화제에서 소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통계와 연도를 맞춰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총 79개국, 312편이 상영되었다. (2016년에는 69개국에서 온 300편이 상영된다!) 그 해 제작된 영화 중에 4.2%의 영화가 부산에서 상영된 셈이다. 물론 2014년 상영작에는 장/단편과 회고전 등이 포함되어 있고, 프로그래머가 그해에 제작된 전 세계의 영화를 모조리 다 보고 선정한 것은 아니겠지만, 단순하게 계산하면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한 명의 관객인 내가 영화를 본다. 하루에 적게는 한편, 많게는 심야상영까지 포함해 7편을 볼 수 있다. 심야를 제외하고 4회차를 모두 본다고 해도 영화제 내내 참여했을 때 40편을 채 볼 수 없다. 영화제 공식 초청 상영작 중에 13%도 되지 않는 수치다. 보통 나는 3~4일간 참여해서 하루에 두세 편을 보니까 부산에서 대략 10편의 영화를 본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의 3% 정도가 된다. (전 세계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에 부산에서 상영되는 편수의 비율과 부산에서 상영되는 영화 중에 내가 보는 편수의 비율이 비슷한 것이 재미있다. 물론 아무 의미 없다….)


 영화제에서 곤란한 점은, 정말 다양한 영화가 틀어지는데 나에겐 너무나 적은 시간이 주어지며 게다가 나는 한 명 뿐이라서(21세기인데도!) 숙고해서 영화를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고른다고 해도 티켓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프로그래밍은 프로그래머만 하는 일이 아니다. 모든 관객은 그 나름의 영화제를 프로그래밍한다. 매 해 가을, 한 사람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영화제 시간표를 짜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영화제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모든 영화가 보고 싶어지고, 경주하는 것처럼 밥도 못 먹고 잠도 줄여가며 힘들게 표를 구해 꾸역꾸역 좌석에 앉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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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홀로 떠난 첫 여행은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였다. 당시 고3이었는데, 수시전형으로 지원한 대학교의 합격 발표가 나기도 전인데도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부산영화제에 가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오전 9시에 시작하는 예매가 수업시간과 완전히 겹친다는 점이었다. 나는 수업 중간에 “선생님!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영화 제작반 동아리실이었던 미술실에서 예매 전쟁에 참여했다. 인터넷 예매는 서버 다운으로 실패해서 전화통을 붙잡고서야 (그 당시에는 전화예매도 가능했다) 예매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전화선은 불통이었고 예매를 마치기까지는 1교시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내가 돌아오지 않자 생물 선생님은 ‘OO이는…. 설사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수업을 마치셨고 한다. ‘OO는…. 설사인가?’는 한동안 우리들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름과 ‘…설사인가?’ 사이에 최대한 여운을 길게 주는 것이 포인트다)



2005년 부산에서 본 영화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스즈키 세이준), <브로큰 플라워>(짐 자무쉬), <미 앤 유 앤 에브리원>(미란다 줄라이), 그리고 그 해의 개막작이었던 <쓰리 타임즈>(허우 샤오시엔)였다. 지금 이렇게 꼽아 보니 면면이 대단한 작품이지만, 동시에 개인의 취향이나 개성이라곤 보이지 않아 재미없는 리스트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를 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프로그래머 추천과 [씨네21]의 특집 기사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까닭이다. 영화 선정의 이유가 그렇다 보니, 유명한 감독의 특별한 작품이라는 데도 개인적으로는 와 닿지 않아서 곤란했다.


이를테면 <쓰리 타임즈>를 통해 허우 샤오시엔 감독님의 세계에 처음으로 입문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결론에서 출발해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갔던 셈이며, 짐 자무쉬 감독님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던 관객에게 <브로큰 플라워>는 지나치게 심심해서 이 작품이 왜 ‘주목받는’영화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중에 영화에 대한 나의 감각과 영화제와의 온도 차가 가장 컸던 영화는 단연 스즈키 세이준 감독님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2005) 이었다.


결제에서 예매 완료로 넘어가지 않아 실패한 줄 알았던 인터넷 예매분이 모두 성공한 것으로 밝혀져서(?) 그 해 화제작이었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표가 몇 장 남았다. 대영극장 앞 현장판매 부스에는 여러 사람이 오전부터 돗자리와 양산을 펴고 앉아 있었고, 표를 내놓겠다는 이야기를 하자마자 맨 앞에 앉아있던 분이 벌떡 일어나서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연신 인사를 하셨던 상기된 얼굴이 뿜어내는 열기가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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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산만한 혼종의 영화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탭댄스를 추다가 사랑 노래를 속삭이고, CG임을 숨기지 않는 배경 앞에서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랩을 한다. 다른 언어가 아무렇지 않게 오가고, 진지해야 할 장면에서 한없이 우스꽝스러워진다…. ‘전에 없던 영화를 본다’는 만족감은 있지만 ‘이 영화에 무엇이 있길래?’ 같은 질문이 (감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티켓나눔터에서 만났던 붉은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분은 영화가 만족스러우셨을까?


낯선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보다는 대영시네마 1관, 2층짜리 대형 극장을 가득 채웠던 관객들의 흥분 - ‘내가 이 영화를 본다!’라는 느낌 - 이 나에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추상적인 감각으로서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극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뿜어내는 체온의 열기가 느껴졌다(고 기억한다). 이 영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독님이 얼마나 대단한 거장이고, 작업의 연장선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첫 부산국제영화제의 인상은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엔딩크레딧이 끝나도록 멈추지 않았던 길고 열정적인 박수 소리로 남아있다.



이 상영은 스즈키 세이준 감독님의 GV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몸이 좋지 않으셔서 산소호흡기 통이 담긴 작은 캐리어를 끌고 무대에 오르셨다. 


그렇다. 영화제의 열기에 휩싸여, 스스로 한껏 고조되어 GV에서 질문도 했다. 감독님의 전작도 본 적 없고, 영화도 잘 모르겠으면서…. 2층짜리 대형 극장이라 1층까지 내려가 질문을 드렸다. 정말 너무 몹시 부끄러운 기억이다…. 뭐라고 질문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그때 관객과의 대화 녹취록이 남아 있었다! (인터넷이 이렇게 무섭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던 관객8이 바로 나다.



관객8: 거장 감독이라고 하지만 저는 처음 접하는 신인 감독 같이 느껴지는데요. 아까 핸드프린팅 때 산소탱크를 들고 하셨 는데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작품을 할 때마다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젊은, 영화를 사랑하는 감독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감독: 영화를 찍으면서 뭔가 나에게 돌아와서 얻어지게 되는 인생관은 전혀 없습니다. 저희 연대의 사람이 영활 만들 때 촬영 소라는 곳이 있어서 거기에서 작업을 계속했는데 영화를 찍는 것 자체가 생활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생활의 수단으로서 계속 영화를 찍어왔습니다.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돌 아와서 인생이 달라지지도 않고 세상이 변하지도 않고…. 그리 고 제 경우에는 담겨져 있는 메시지가 일체 없구요. 아까 말씀드 렸듯이 오락 일변도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말은 젊은이는 적이다. (웃음) 타도하자 젊은이! (웃음과 박수) 



먼저 변명해야겠다. 첫 문장은 ‘저는 처음 접하는 감독님의 영화였고 신인감독의 영화처럼 새롭게 느껴졌습니다.’라는 요지였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기록되었고 고통은 영원하다…. (영화제에서 이상한 질문을 하지 말자. 기록은 영원히 남아 괴롭힌다) 스스로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관객의 이상한 질문에도 재치있는 답변을 해 주셔서 유쾌하게 GV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니 참으로 다행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즈키 세이준 감독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을 통해 감독님의 이전 작품도 찾아보게 되었고, 감독님이 만드신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라면 참 아름답겠지만, 그렇지 않다. 감독님의 전작을 챙겨보기는 쉽지 않았고 그 정도의 끈기를 끌어내기엔 나의 게으름이 대단했다. 다만 그 경험을 통해 세상에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런 영화를 사랑하는 정말 많은 관객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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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총 2회의 공식 상영을 가졌고 이후에 일본영화제 등에서 상영된 기록은 있지만,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지 못했다. 


대영시네마 1관 946석과 해운대 메가박스 5관 320석을 합쳐 1266명에게 허락된 영화를 보기 위해 마우스를,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 부산은행 창구에 매달리거나 티켓나눔터에서 밤을 새웠던 1266명의 사람은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낯선 영화에 어리둥절했던 나를 휘감던 사람들의 체온과, 티켓나눔터에서 땀을 흘리며 기뻐 인사하던 얼굴은 이제 어디에 있을까.


나는 종종 영화제 극장 의자에 앉아 상영을 기다리면서 ‘지금 이 상영관에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을 함께 봤던 관객이 있을까?’생각하곤 한다.



영화제가 무엇이길래 단 두 번, 222분간 영사되고 사라질 영화를 보기 위해 이 많은 시간과 열정과 노력을 쏟는 걸까. 2005년 10월 11일, 누군가는 “인생영화”를 만났을까? 



책을 만들면서 혹시나 해서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이 무려 두 장의 디스크가 포함된 DVD로 출시된 바 있었다. 지금은 품절되었지만 중고를 구할 수 있어서 11년 만에 영화를 다시 봤다. 형식적인 새로움과 낯선 감각은 여전하지만, 난장의 이미지로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와 연출의 의도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영화제에 초청된 거장의 신작이다’라는 사실에 압도당해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도 못한 채 물음표를 삼키며 당황하지 않고, ‘이런 건 실패했지만 저런 건 좋았다’고 나름대로 비평하며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나의 영화 경험을 되돌아봤을 때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너무 빨리 온 영화였던 것 같다. 내가 ‘영화’라고 규정했고 이해했던 범주를 가뿐히 뛰어넘었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은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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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영화제에서 만나는 영화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와 있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소개해주는 영화제가 좋다. 지금 가장 새로운 영화를 통해서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계를 넓혀주고, 계속해서 나를 놀라게 하거나 당황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불안한 기대감’을 안고, 나는 또 영화제에 가서 꾸역꾸역 좁은 좌석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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