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의 세상]은 여러 형태의 결과물과 함께 그 작업의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3권으로 나누어 발간했던 <ICELAND TRAVEL>을 합본호로 만들면서 겪은 편집의 시행착오와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계획이 있으시다면 그 이후에 읽어주시길 부탁합니다. 한편 제작자의 생각이 책 외적인 곳에서 드러나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분들께는 적절한 포스팅이 아닐 것입니다.




#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독립출판으로 발간한다는 프로젝트는 2011년 7월에 시작되어 블로그에 그 과정을 기록해왔다. (링크) 시작할 때는 인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조차 전혀 없었으나 많은 분의 도움으로 조금씩 구체화할 수 있었다. 여행기라는 포화상태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데다가 제작비의 한계로 인해 3권으로 나누어 발간하기로 했고 2011년 8월, 2012년 1월,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책이 나왔다. 그리고 2014년 11월 세 권의 합본호인 <ICELAND TRAVEL>의 발간으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다.


<ICELAND TRAVEL>을 이야기할 때면 조금 부끄러워진다. 2009년에 겨우 2주 다녀온 아이슬란드와 페로제도의 경험을 얼마나 오래 우려먹는지. 거기에 삶의 정수와 여행의 비결이라도 있는 것처럼. (변명하자면) 나에게 이 작업은 길게 우려낸 사골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담았다가 한 권으로 묶어내기까지를 포함하는 단일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반복되는 지루함으로 느껴진다면, 분명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제작의 규모와 홍보의 방향은 '나의 경험'이라는 사적인 목표와는 다른 욕망과 방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합본호 재편집을 위해 오래간만에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며 내 기록임에도 낯설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문장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나의 여행이었는지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경험은 유어마인드에서 했던 "아이슬란드를 여행하기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기"라는 행사를 통해 나눴다.) 여행의 많은 기억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내용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반대로 덜어내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잡았다. 




왼쪽 <ICELAND TRAVEL> 02, 오른쪽 <ICELAND TRAVEL> 합본호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리하자면, Iceland on your own, TREX 모두 왕복 버스와 가이드가 포함된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반면 내가 구입한 버스패스는 단지 구간을 연결해주는 일반버스노선 티켓이다. Iceland on your own은 Reykjavik을 중심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오가는 - 혹은 그 지역들을 연결하는 - 노선이 많고, TREX는 아이슬란드 전체를 순환하는 노선이 잘 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작은 투어 회사들도 존재한다. (<ICELAND TRAVEL 02> 5th day중 삭제분)



원래 정보가 배제된 글이었으나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방식과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여행 정보가 언급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5년도 더 된 내용이라 유효하다는 보장도 없었고, 사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정보가 등장할 때 이야기의 맥락이 흐트러지는 단점이 두드러져 보였다. 합본호는 이런 부분을 덜어내게 되면서 인물이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그런 이해가 과연 이 이야기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라고 생각했다.



<ICELAND TRAVEL> 01 중 삭제된 페이지


Vik을 산책하면서, ‘공평함’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은 늘 공평하려고 노력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졌다. 어제 갔던 Pub에서 서빙하던, 낯선 동양 남자아이에게도 ‘공평’ 하려고 노력했던 (하지만 쉽지 않았던) 이십 대 중반의 여자는 아마도 이 아름다운 해변과 들판을 매일같이 바라보며 자랐을 거다. 때로는 이 고요한 아름다움에 답답해하며, 내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에서 공부하고 일하며 늙어갈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보고 자랄 풍경과 삶의 형태는 내가 사는 곳과는 너무 달랐다. 두 삶이 처한 조건을 공평함이라는 기준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이슬란드의 생경한 풍경은 한국에서 볼 수 없고, 한국의 고유한 풍경은 아이슬란드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원래 불공평한 자연에서 불공평한 삶을 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국가 혹은 더 큰 입장에서는 공평함을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너무나도 다른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공평’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ICELAND TRAVEL 01> 2nd day중 삭제분)



애매한 생각들도 덜어냈다. 01권 발간 당시 어떤 분이 블로그에 이 부분을 언급하며 동의하기 어렵다는 글을 올려주셨다. 빈약한 문장에 담긴 모호한 생각이 들통 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자연 풍경과 인종, 그리고 삶이라는 개념이 공평함이라는 공통의 분모로 꿰어지는 것에 무리가 있다.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발산하는 생각들이 한정적인 단어(공평)로 판판해졌고 그걸 그대로 적어냈다.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생각들, 심지어는 그 당시에도 나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덜어냈다. 결과적으로 합본호의 텍스트 분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늘어지는 대목을 더 덜어낼까 싶었으나, 시시콜콜하게 기록하고 경험을 이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첫 여행의 몸부림은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 정리된 텍스트와 미수록된 사진을 추가해서 합본호를 만들었다. 레이아웃과 편집의 스타일은 이전 책과 동일하게 가져갔다. 다양한 편집을 시도해 보았지만, 46판 크기에서의 가독성과 나의 디자인 능력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최선 같았다.

다양한 편집 시도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에 마지막 점검용으로 인디고 출력으로 샘플 책을 만들었다. 다듬어진 글과 더 많은 사진으로 만든 테스트본을 받아들고서, 이상하게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말 이것으로 충분한가.



<ICELAND TRAVEL> 폐기된 테스트본


말하자면 이 책은 2년 전에 내 머릿속에서 완성된 형태 그대로의 책이었고, 그래서 새 책이지만 이미 낡은 책이었다. 작업을 중단하고, 합본호를 만든다는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어떤 책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 여행을 다녀와서 그것을 정리하고 책으로 옮기는 작업의 마무리인가. 그런 거라면 단순하게 3권의 책을 합쳐놓은 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주 오래된 기록이, 충분하게 이야기된 후에도 다시 한 번 책이라는 형태로 엮이기 위해서 필요한 당위가 부족해 보였다. 그런 관점에서 테스트본은 2012년의 당위는 가지고 있으나 2015년의 당위는 없었다.


다시하는 건 즐거워


책을 가까이에서 오래 봐 주셨던 분들께 조언을 구했다. 단순하게 책을 합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와 닿았고, 타인의 자료를 해체하듯 다시 조립하는 파격적인 작업은 어떠냐는 조언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기록 당시보다 더 기억하는 것이 없는 지금 무언가를 더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히 재조립된 형태의 결과물로 가기엔 온건한 형태의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생각은 '잊힌 기록을 다시 엮어낼 때 그 시간의 공백도 담는 책이 가능할까?'라는 방향으로 좁혀졌다.



# 사진을 이렇게 저렇게 편집해 보다가, 말도 안되게 확대를 해봤다. 인쇄를 위한 최소한의 dpi를 넘어선, 뭉개진 노이즈의 덩어리가 있었다. 사진을 확대한다는 것은 더 선명하게, 더 잘, 더 확실하게 보기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확대가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오히려 모든 것은 흐려지고 불확실해진다. 색감과 인상만 남는다. 아이슬란드 여행의 마지막 날 캠코더 포커스를 잘못 조작해서 흐릿한 영상을 찍은 것이 있다. 그 당시 흐릿하게 뭉개진 영상을 찍으면서, 2주일 남짓한 여행의 기억이 뒤범벅된다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5년 전의 기록을 계속해서 들여다본다. 끈질기게 바라볼수록 현실감과 현장감은 사라지고 불균질한 기록의 조각들이 과연 이 여행을 대표할 수 있는 샘플인걸까 하는 의문만 남았다. 그 의문을 그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글은 5년 전의 글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글에서 무엇이 사실이었고 무엇이 착각이었는지 헤아려 내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신 사진을 과도하게 확대한다. 인상만 남은 여행을 인상으로 전달한다.


왼쪽 <ICELAND TRAVEL> 01, 오른쪽 <ICELAND TRAVEL> 합본호 (붉은 사각형이 합본호에서 크롭된 영역)


사진 크롭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줌이 되지 않는 필름카메라로 막 찍어낸 주제에 그렇게 잡힌 사진이 인상의 전체라고 착각한다. 크롭이라는 가공을 덧대는 것은 보여주고 싶은 것을 강요하는, 이를테면 뒤늦게 개입된 욕망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은 관점과 의도를 가지고 사진을 대할 자신이 없어서 회피하는 것이면서.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약 없이, 심하게는 100dpi 정도가 될 때까지 확대했다. 압도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대신에 색감과 인상에 초점을 맞추어 사진을 잘라냈다. <블링 링>의 티저 포스터(프로파간다 작품, 링크)를 보며 깜짝 놀랐던 게 생각난다. 이렇게 과감한 트리밍과 확대로 인한 노이즈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기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이제는 노이즈와 색감의 왜곡을 빈티지한 멋으로 받아들이고, 용량의 한계 속에서 의도한 이미지를 다 담아내기 위해서 저화질을 감수하는 gif에 익숙해져서 생긴 변화일까? 확대와 노이즈를 거친 사진이 다소 과도하고 보기에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인쇄소와 주변에서 괜찮다고 해 주셔서 용기를 냈다. 



Vik에서 떠나는 버스는 12시 45분에 있어서, 오전에 바닷가와 트래킹 루트를 걷기로 했다. 평온한 Vik의 해변을 걸으면서 인간의 시야에 비해 기계의 그것은 얼마나 좁은지 실감했다. 캠코더나 사진기의 렌즈는 아이슬란드의 탁 트인 풍경을 조각조각 부숴버려 그 감흥을 온전히 담기 어려웠다. 깎아지른 절벽의 푸른 풀들과 검은 모래 너머로 반짝이는 바다는 ‘Iceland’라는 이름이 얼마나 잘 못 붙여진 것인지 항변하는 것 같았다. (<ICELAND TRAVEL 01> 2nd day 중)



사진을 크게 확대하기로 하면서, 사진과 글을 완전히 분리하기로 했다. 사진은 무조건 한 쪽 이상을 가득 채우고, 텍스트는 사진과 같은 쪽에 담지 않아 대비시킨다. 가로로 긴 - 아이슬란드의 드넓은 풍경과 잘 어울리는 - 사진을 담을 수 없게 되었으나 어차피 편집의 방향이 아이슬란드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과는 반대로 나아가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대신 가로로 긴 사진을 꼭 쓰고 싶을 때는 펼침면을 넘겨 3페이지, 때로는 4페이지에 걸쳐 담았다. (담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여행을 하면서 아이슬란드의 풍경이 너무 트여있어서 사진이나 캠코더, 심지어는 코에 걸친 안경의 프레임이 풍경을 조각내고 있다는 걸 인지했던 신기한 경험과 연결될 수 있다. 가로로 넓은 사진이긴 하지만 페이지 앞뒤 면으로 붙어서 이어지는 사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차피 그 드넓은 풍경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면, 내가 본 대로 조각내어 담기로 했다. 여행의 경험을 책의 구조에 대응시켜 편집한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다만 독자가 이런 방식의 레이아웃과 의도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디자인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3페이지에 걸쳐 담긴 아이슬란드의 풍경



# 단호한 말투로 적어 내려가고 있지만, 확신이 없어서 여기저기에 의견을 구하고 심지어 대신 결정해달라는 민폐도 부렸다. 유어마인드의 이로님은 만약 사진 편집을 통해 시간의 격차를 드러내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시간의 간격을 드러내고 그 틈을 변명하기 위해서 01, 02, 03권의 시작과 끝에 적었던 서문과 후기의 방식을 가져왔다. 2014년의 서문과 2014년의 후기로 책의 가장 바깥을 싼다. 이 글은 2011년과 2012년의 책, 혹은 그 책을 만들던 나를 설명하는 글이 된다. 그 안으로 2011년의 첫 서문과 2012년의 마지막 후기가 위치한다. 그 글은 2009년의 여행을 몇 년 뒤에 다시 보면서 가졌던 생각을 담고 있다. 그다음에야 마지막으로 2009년의 여행이 가장 안쪽에 담긴다. 두 번의 낙차를 통해 여행기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게 된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2014년의 서문과 후기가 사족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은 합본호 한 권으로 당위가 서는 책이 아니므로, 2011년과 2012년의 책을 언급하고 거기에서 생겨난 시간의 공백을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 책 표지는 예전의 시리즈의 레이아웃을 이어가고자 했다. 01, 02, 03권의 표지에는 ICELAND TRAVEL과 책 번호, 그리고 머문 마을을 표기했다. 그런데 합본호에 모든 마을을 기입하자니 글씨 크기가 작아지면서 의도했던 인상이 무너지는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 <ICELAND TRAVEL> 이라는 제목을 지을 때, 특징도 인상도 없는 '아이슬란드 여행기' 자체로 남길 바랬었다. 사람들이 이국적인 장소를 소리를 내 읽어볼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읽지 못한다.) 푸른 빙하의 이미지와 쉽게 읽을 수 없는 단어들이 'ICELAND TRAVEL'이라는 제목과 등가의, 혹은 더 강한 감흥을 가져온다고 생각헀다. 그래서 제목을 책의 뒤 페이지로 보내고, 표지에는 머문 도시들만 표기하는 방식으로 글씨의 크기를 확보했다. (아직은 아무도 나에게 제목이 책 뒷면에 있는 것이 관해 물어오지 않았다. 의외로 자연스러웠거나 내 생각보다는 파격적이지 않은 듯하다.) 어차피 이 책에는 저자의 이름도 없다. 나에게는 긴 여행의 마침표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으로 보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처음 보는 무명의 이상한 책이 될 것이다. 



# 아이슬란드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하고 있다. 그러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것이 <ICELAND TRAVEL>의 마지막 여정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대신 이 책이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즐겁게 즐기려고 한다. 이제 이 여행이 나의 여행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 것처럼, 이 책 역시 그러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책은 스스로 또 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유어마인드 이로님, 더북소사이어티, 사소한스튜디오, 홍진CNP 이덕기님, 텀블벅 3권 후원자,
최신행님, 조문주님, 크레인 전병훈님, 책을 입고해주시고 소개해주신 전국의 독립출판 서점,
그리고 책을 구입해 읽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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