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팬진'이라는 형식을 취한 <THE SUMMER>를 2호까지 만들면서 들었던 생각과 고민을 정리한 글이다. 1호를 만들고 쓰기 시작했다가 방치해둔 글을 웹문집 <더미> 인터뷰를 계기로 다시 정리했다. 아무리 다듬어도 거친 글의 조각 모음에 다름없다.


꿀프레스(링크)의 모래씨가 만드는 <더미>(링크)는 매달 하나의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낸 작업을 모아내는 웹 문집이다. 그중 한 꼭지인 'small and few'는 제작자 인터뷰나 미수록 원고를 담는데, 6호에서 <THE SUMMER>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았다. <더미> 6호의 인터뷰와 이 글을 평행하게 읽는다면 내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작업 과정과, 다른 작업자가 보면서 가지는 생각이라는 두 가지 맥락을 함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미 6호: 러브레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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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영화成長映畵


 두껍고 큰 책과 작지만 아주 사적인 책을 연달아 만들고 나서, 다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영화를 소재로 하고 싶었다. 물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 고백이 낯뜨거운 자기만족에 그치기 쉽다는 걸 알지만, 때때로 낯뜨거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말하고야 마는 마음을 보며 감탄하곤 한다. 막연한 생각은 <월플라워>를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성장영화'라는 주제로 좁혀서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권에 하나의 성장영화를 담은 얇고 작은 책.


잡지가 아닌 팬진


 독립출판을 접하면서,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기성 출판시장과는 정반대로) 단행본보다 잡지가 더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삐뚤어진 마음에, 그렇다면 나도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잡지라는 단어의 무게 -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일정한 주기로 계속 찾아올 것을 약속하는 - 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다. 그 정도로 푹 빠진 주제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월간이든 계간이든 꼬박꼬박 찾아갈 성실함 혹은 여유가 부족하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기성 출판에서 잡지는 짧은 주기로 캐치해내야 하는 소재들을 발 빠르게 전달하는 데 의의를 두면서 가벼워진다면, 유난히 오가는 사람 많은 독립출판에서는 꾸준하게 목소리를 내겠다고 약속하는 잡지가 (한 두 번 치고 빠질 수도 있는) 단행본보다 더 진중한 선언 내지는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잡지와 유사하게 연속 간행물의 형식을 취하는 <THE SUMMER>를 굳이 팬진이라 이름 붙인 것은 2차 저작물로서의 진zine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잡지가 약속하는 것들과는 선을 긋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게감을 가지는 작업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쩌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팬진이라는 건 뭘까


 처음에 팬진이라는 표현을 떠올린 건 좋아하는 성장영화에 대한 순수한 애정 고백을 책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Fan이 만든 zine'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zine 혹은 팬진fanzine 무엇인가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점점 미궁에 빠지게 된다. <What does "The Book Society mean?>(링크)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우리가 그 당시 만들었던 진들은 진짜 진이라고 하긴 좀 그래요. 옵셋이나 디지털 마스터 인쇄를 하고 모두 정진열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해 준거죠. 제록스 복사기와 호치키스로 뚝딱거리고 만든 진들은 아니에요. 하지만 진이라는 정체성을 위해서 디자인 작업을 최소화시켰던 것 같아요.' 


 '진짜 진'과 '진'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짜 진'이라면 응당 복사기로 출력해 호치키스로 제본을 해야 하는 걸까? '디자인 작업이 없거나 최소화함'이라는 게 진의 정체성인 걸까?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툴에 대한 능력과 디자인 감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진을 만드는 것이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걸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된 것은 질문을 이어가면서 무언가의 경계를 짐작해보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팬진이라는 용어를 잘 못 사용했을 때 실제로 팬진을 만드시는 분들께 실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표현의 오용이 흐려놓는 본질. 그러나 팬진은 페어나 직구 등을 통해 소비되어서 독립출판 영역에는 거의 없고, 나의 작업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절대! 본질에 영향을 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팬진'이라는 표현의 가벼움을 취하기로 했다. 하하하... (이러다가 벌 받을 것 같다.)


불법으로 애정 표현하기


 한편 책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딜레마는 저작권 이슈였다. 원저작자(=제작사)에 일일이 문의를 구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큰 스튜디오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월플라워>를 수입한 데이지엔터테인먼트는, 국내 수입사의 동의를 구한다 하더라도 제작사의 허락과는 별개라서 그쪽에서 문제시할 수 있다고 했다. 몇몇 서점과 제작자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원저작자에 알려지게 될 경우가 걱정이에요.'라는 말에 빵 터지는 분도 있었고, '문의했다가 거절당하면 안 만들 거에요? 알려질 리 없으니 그냥 만드세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작업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고. 그러나 대부분 그런다고 해서 그게 정당한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팬진이라는 장르는 태생이 저작권 침해의 속성을 가지는데 그것이 원작에 대한 애정 내지는 선의만으로 호소 될 여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의 돌파구는 있다. 이익을 내지 않으면 된다. 실제로 많은 팬 필름fan film 은 수익을 내지 않고 공개하는 대신에 저작권 침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다. 다만 팬 활동이 원작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데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에 수익 창출을 포기할 경우 제작자가 보통 눈을 감아주는 편이라는 말이다.) <THE SUMMER>는 매 호당 100만원 정도를 인쇄 및 고료로 사용하는데, 저작권법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무가지로 배포하면 된다. 근데.... 사실 그건 불가능했다. 결과적으로 만들까 말까의 경계에서 나는 그냥 만들기를 선택했다. 물론 <월플라워>의 경우 국내 수입사의 허락을 받았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수입된 지 오래되어 국내 수입사의 권한이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까지 다 해결하지 못한 채 작업을 시작했다.


아티스트북도 팬진도 아닌


 팬진을 기획하면서 눈여겨봤던 책 중에 <A Pocket Companion To Books From The Simpsons In Alphabetical Order>(링크) 가 있는데, 심슨 애니메이션의 캡처로 만들어진 이 책의 저작권 문제가 궁금했다. 책에는 별도의 저작권에 대한 표기가 전혀 없어서 이마저도 원제작자와 협의하에 생략하기로 허락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합법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진 작업인지 의문이 들었다. 이 작업의 경우 이미지가 1도로 변형되어 있고, 아티스트의 주관적 의도가 들어가 있어서 아티스트북의 영역에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나는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링크) 팬진fanzine 을 'nonprofessional and nonofficial publication produced by fans of a particular cultural phenomenon (such as a literary or musical genre) for the pleasure of others who share their interest' 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프로페셔널(이라는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해지면 팬진이 아닌가? 그것은 누가 정하는 걸까? 작가의 의도가 어디까지 개입했을 때 팬진은 아티스트북으로 인정받는가? 그리고 작가가 만드는 아티스트북은 저작권으로부터 자유로운가?


 <THE SUMMER> 초기 편집 컨셉중에는 의도적으로 로우-퀄리티를 지향하는 것도 있었다. 이미지를 1도로 고쳐 거친 질감의 종이에 인쇄한다거나, 커다란 텍스트를 별도의 레이아웃 배치 없이 때려 박는 식으로.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보니 내 것 같지가 않았다.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미국 하위문화의 팬진-스타일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게 다 뭔가 싶었다. 그래서 다 지워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THE SUMMER>는 '팬진'이라는 방식(내지는 문화)의 의도도 뉘앙스도 형태도 가져가지 못한 팬진이 된 셈이다. 


글을 모으는 과정


 좋아하는 마음은 막 차오르는데, 그걸 글로 쓰자면 몇 단어로 정리되면서 맥이 빠지곤 한다. 성장 영화를 보고 울렁거리는 마음을 아무리 적어 내려가도 원고 두 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처음에는 전부 혼자 쓰고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일정 기간 동안 글을 받아서 그중에 선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싶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공모'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고, 영화마다 어떤 테마 아래 팬진을 엮고 싶은데 공모를 받으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웹 서핑과 책 검색을 통해 이미 발표된 글 중에 좋은 것들을 선별해 그 글을 쓴 분에게 문의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물론 허락을 받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일단 하면 된다.) 문제는 내가 필진을 찾아 나설 때 생긴다. 그분이 영화를 봤고, 좋아했고,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감흥이 있어야 하며, 그걸 글로 풀어낼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프로필에 '<월플라워> 특히 감동적으로 보았음'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사연이 있음' 이라고 적어두면 좋겠지만...


 그래서 대부분은 우연히 알게 된 분께 불쑥 부탁하게 된다. 트위터 검색으로 아들과 함께 <월플라워>를 본 fionasse님을 발견했고, 팔로워도 아닌데 무작정 내가 누구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려니 글을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상대방에게는 당황스러운 주문이었고, 나로서는 글을 써 주실 수 있는 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과도 같은 시도였다. <THE SUMMER>를 준비하면서 이걸 책으로 만들 가치가 있을까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fionasse님의 원고를 받아 읽으면서 이 글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겠다, 심지어 원고를 못 모으면 이 글만이라도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를 통해 불쑥불쑥 추상적이고 사적인 부탁을 했고 다행히 모두 흔쾌히, 정성껏 글을 보내주셨다. 감사할 일이다.


고료


 팬진을 무가지로 배포할 수는 없으니까 판매하긴 하되, 수익을 전혀 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그래서 제작 원가와 서점 수수료를 제하면 수익은 없다. (사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무튼 제작 원가로 들인 돈을 회수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더 정확히는 언제나 누군가의 을인 사람으로서, 팬진에 원고를 부탁하면서 수익이 없는 작업이니 '재능기부를 부탁드린다'라거나 '좋은 게 좋은 거' 같은 말은 하기 싫었다. 2만원의 고료를 드리고 있는데, 나로서는 매 호 10만원 정도의 고료 지출이 있긴 하지만 받는 분 입장에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라는 걸 알고 있다. 사실 적당한 고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다. 매체마다, 작가의 위치에 따라 다를 텐데 주변에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평균치도 모른다.  친구는 '그 돈은 고료가 아니라 네가 적어도 고료를 지불했다는 편안함을 얻기 위해 주는 금액에 불과하다.'라고 직언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어 대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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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여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마르셀의 추억>을 봤다. 유년시절의 소소한 에피소드와 소박한 웃음으로 채워진 소품이었다. 영화의 말미, 갈등이 해결되고 모두가 즐겁게 식사를 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하는 성인 화자의 나레이션이 마음을 무너뜨렸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짧은 환희의 순간들은 지울 수 없는 슬픔에 덮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Telle est la vie des hommes. Quelques joies trÈs vites effacÈes par d'inoubliables chagrins. Il n'est pas nÈcessaire de le dire aux enfants.' 순진한 아이들의 얼굴을 배경으로 죽은 어머니, 지나가 버린 감각들, 슬픔과 상실을 이야기하는 그 간극이 주는 상념이 컸다. 유년기와 현재의 이미지를 바로 이어붙이고 그 낙차를 통해 잊고 있던 성장의 잔여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영화라는 매체라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성장영화가 주는 그런 시간의 간극. 어른이 만드는 유년기의 이야기를 유년기의 배우가 연기하고, 그것을 어른인 내가 감상할 때 환기되는 나의 유년기. 여기에서 계속 발견되는 낙차가 마음을 울렁거리게 한다. 그 점이 성장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THE SUMMER> 01호의 맨 뒤 페이지에 '다 큰 어른이 성장영화에 매혹된다는 것은 퇴행적이나 미성숙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썼다. 그럴지도 모른다. 05호까지 예정된 <THE SUMMER>를 계획된 시간 동안 다 만들고 나면 서른이 된다. 그때 이 팬진과 글을 보면 오그라들겠지. 하지만 나는 그 낙차를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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