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녹색 광선』 메이킹북에 실린 기획자의 글 입니다.)

(『녹색 광선』 2쇄 발간을 위한 텀블벅 후원이 3월 29일 밤까지 진행중입니다 https://tumblbug.com/lerayonvert2 )



 쉬는 시간 학교의 복도나 방과 후 놀이터에 떠도는 이상한 이야기가 있었다. 학교 화단에 있는 ‘책 읽는 소녀’ 동상은 밤마다 책을 한 페이지씩 넘긴다거나, 엄지와 검지로 만든 원을 통해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100개를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어딘가 으스스하거나 이상한 규칙의 이야기들. 표현과 디테일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동네를 가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언제, 그리고 왜 만들었으며 어떻게 퍼져나갔을까 늘 궁금했다. 한 명의 장난으로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나도 이상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서 퍼트려볼까?


 ‘녹색 광선을 보면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130년도 더 이전에 일몰 중에 관찰할 수 있는 독특한 현상 하나가 발견됐고, 거기에 ‘녹색 광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누군가 그 현상에 로맨틱하면서도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맨 처음 ‘녹색 광선’에 그런 전설을 부여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가능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 왜 하필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선택했을까? 이제 와서 알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 결과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한 편의 소설이 쓰여졌고, 100여 년이 지난 후 프랑스에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다시 그로부터 30년 후 한국에서 그 소설이 번역되었다. 처음에 이 전설을 고안했던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오래, 그리고 널리 퍼져나가리라고 짐작했을까?



 『녹색 광선Le Rayon vert』(1882)과의 인연은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에릭 로메르의 영화 <녹색 광선>(1986)을 본 것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씨네필이 애정을 표해 마지않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들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시종일관 예민하고 방어적인 델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서면서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여러 가지 선택과 결정 사이에서 나의 마음을 모르는 기분, 그러나 뭔가 좋은 일이 벌어지길 바라는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다만 마음을 연 델핀이 맞이하는 아름다운 엔딩 장면이 주는 탁 트인 감흥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영화를 보면 곧장 가까운 종로3가 알라딘이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그 영화에 대한 책이나 OST를 찾아보곤 한다. 운이 좋으면 조금 전에 본 영화의 OST나 원작소설, 비평서를 구할 수 있다. <녹색 광선>을 본 뒤에는 에릭 로메르와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영화에서 모티브가 되었다고 언급되는 쥘 베른의 『녹색 광선』이라는 소설이 궁금해졌다. “녹색 광선을 보면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로맨틱한 전설이 모험 SF 작가로 익히 알고 있는 쥘 베른과 만나 어떤 작품으로 만들어졌을까? 『녹색 광선』 책을 들고 델핀이 걷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녀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검색을 통해 번역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크게 실망했다.


 그때부터 『녹색 광선』을 읽어보고 싶다는 작은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점점 커졌고, 어느새 언젠가는 하고 싶은 작업이 되었다. 너무 큰 일이고, 막연한 일이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녹색 광선』은 책을 먼저 읽고 출간을 결정하거나, 문학적 관점에서 계획되는 일반적인 출판사의 번역서 발간과는 다른 과정으로 출간되었다. 보통의 번역서라면 출판사 내, 외부의 전문가가 원서를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다. 지금 한국에서 소개할만한 내용인지, 충분한 작품성과 시장성을 가지는지 평가하고 예측을 토대로 출간 여부를 결정한다.


 번역서 발간 작업을 고민하던 중에 전문가에게 원고 검토를 요청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만약 검토 결과 ①재미가 없습니다, 혹은 ②시장성이 없습니다, 라는 답이 오면 어떻게 될까?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굳이 번역할 필요도 없겠네요. 덕분에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사그라졌습니다.’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녹색 광선』은 이윤을 낼 수 있는지 혹은 작품이 소개되는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산업적인 판단 밖에서 ‘읽어보기도 전에’ 매혹당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검토 결과에 따라 마음이 돌아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9세기에 쓰인 800매 분량의 소설임을 고려한다면 매우 무모한 결정임이 분명하지만, 다행히 번역을 마치고 읽어 본 『녹색 광선』은 재미있으면서도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이상한 이야기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입에서 귀로, 필사에서 프린트로 끈질기게 세월을 이겨내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피어난다.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야기가 소설을 통해, 영화를 통해 몇백 년의 시간을 살아남아 여기에도 도착했다. 어떤 독자에게는 『녹색 광선』이 동명의 영화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거나, 또 다른 독자에게는 지금까지 몰랐던 쥘 베른의 색다른 면모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예언하건대, 이제 바닷가에 가면 나도 모르게 해안선의 상태를 살펴보고 일몰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혹여 아주 맑은 날 완벽한 해안선 너머로 지는 노을 끝에 녹색 광선을 보게 된다면 지금 이 이야기가 떠오를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상한 이야기는 이미 우리 마음에 도착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