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내 방에는 작년에/재작년에 샀지만 여전히 UE봉투담겨있는 책이 많이 다. 그래서 올해는 늘 남기던 언리미티드 에디션 참가 후기(링크)와 함께, 행사에서 구입한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남겨볼까 한다. (즉 책 후기를 통해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강제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본 포스트에 책을 읽을 때마다 내용을 추가하는 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 포스트가 완결되는 시점은 소박하게 내년 UE8 이전으로 잡고 있다..


* 개인의 감상이므로, 책에 대한 선입견에 예민한 편이라면 읽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선입견을 줄 만한 글은 아닌 것 같지만요...)





4. <한국 타워 탐구생활> 유어마인드, 2015

제작자 홈페이지: http://yourmind-bookshop.com/


   언리미티드 에디션 행사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작은 후기 모임을 가졌는데, 마침 <한국 타워 탐구생활>을 들고 아메노히커피점에 들르게 되어 저자이신 시미즈 씨에게 싸인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즐겁게 한 챕터를 읽었으나 그대로 덮어두었다가 얼마 전에 계기가 생겨 완독했다. 싸인까지 요청해놓고 죄송한 일이다. (비극적인 점은 이 후기는 무려 7개월 만이며, 아직 읽지 않은 책의 후기에서 죄송함은 계속 커질 것이라는 사실...)

   <한국 타워 탐구생활>은 타워를 좋아하는 일본 저자가 한국의 타워를 방문하고 쓴 기록이다. 타워를 정의하는 서문에서부터 이상한 유머의 기운이 피어나는 사이 어느새 저자의 진지한 태도에 감동(?)을 받게 된다. 이런 독특한 감흥이 책 전반에 걸쳐있다. 킬킬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멋져..'를 되뇔 수 있으니 카페 - "커피를 파는 점포(136p)" - 같은 데서 읽으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재미없다고 생각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부분에서 매력을 포착하는 시선에서 감탄과 미소가 피어난다는 점에서 <산책론>과 유사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자세는 중독성이 있다. 이를테면 타워에서 볼 수 있는 타워 모형 전시에 대해서 "진짜 타워 안에서 가짜 타워를 만나게 되는 이상함이 아주 타워답다."(23p) 라는 지점을 짚어주고 나면 '정말 그렇구나!' 라고 끄덕이게 된다.

   한편, 자연스럽다가도 어느새 이상한 방향으로 뭉게뭉게 피어나는 생각의 흐름과 문장의 리듬에 킬킬거리게 된다. 이를테면 다음 같은 대목이 있다. "그런데 5년 전에 방문했을 때 이곳은 세계악기박물관 이라는 즐거운 장소였다. 부산은 물론 타워와도 관계없는 박물관이 갑자기 나타나서 상당히 정취 깊었는데 없어졌다니 유감하였다. 어쩌면 타워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신기한 현악기(손으로 돌리는 바이올린, 넥이 많은 기타, 가야금 등등)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타워 관계자는 이 점을 깊이 명심해주길 바란다."(230p) 입구 옆에 타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박물관이 있는 것이 어째서 '정취'로 이어지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 이해가 되기도 하니 표정관리가 어렵다가, 갑자기 이 사실을 명심해달라고 진지하게 일침하는 문장에선 웃으면서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은 얼굴로 책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무서워도 오르는 것이 타워 팬의 숙명이라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1층에 들어갔다."(105p) 라는 순간에 이르면 무언가를 깊이 좋아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의 숭고함까지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기에 타워 마니아가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앞으로 혹시 타워에 오르게 된다면 '시미즈 씨는 이런 부분에서 기뻐하겠지!' 라고 생각할 것 같다.


ps. 고흥 우주발사전망대편 말미에 과연 버스를 잡으신 건가! 이렇게 과감하게 생략한 채 종결해도 되는가! 페이지가 빠진 것이 아닌가 싶어서 여러 번 확인했다...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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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책론> 라야, 2015

제작자 홈페이지: http://lightonthewall.com


   오래 기다려온 책. 그간 라야의 영상과 사진 작업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나와 같았으리라 생각한다. <산책론>에는 책이라는 작업을 염두에 두지 않고(목표에 두지 않고) 본인의 관점으로 작업을 쌓아온 사람이 책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진입하는 순간을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업이 책의 서사를 통과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지점이 독자에게 전달될 때 오는 신선함이랄까.

   책 제목을 들었을 때 고층건물을 오가며 도시의 이미지를 기록해온 작가가 말하는 '도시 산책의 아름다움'을 예상했다. 일면 맞지만, 또 완전히 달랐다. 보통 산책이 2차원의 길을 오가며 발견하는 풍경을 의미한다면 <산책론>에서는 건물을 오르내리는 와중에 내부와 옥상에서 발생하는 3차원의 경로이자 거기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의 인상이 된다. 항공뷰나 거리뷰로는 잡히지 않는, 그 사이 어딘가의 높이와 시선으로 세상을 의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집에 가기 위해, 혹은 가게에 들리기 위해 기계적으로 이동하던 경로가 산책이 될 때 이렇게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니.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사진에 감탄했지, 그 이미지를 잡아낼 때까지 수많은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을 오르내리는 성실한 노동과 집요함에서 더 크게 감동했. (그리고 묘한 덕스러움에도...)

   시선이 확고한 사람의 작품을 읽으면 한동안 그 사람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2스러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잠시나마 '하루키적인' 시선으로 그의 책에나 나올 문장을 뇌까리며 산다. (홍상수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본 뒤에도 나는 한동안 우스꽝스러운 연기자가 된다.) <산책론>을 읽으면서 주변의 건물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저기에서는 어떤 풍경이 보일까 상상해 보는 즐거움이 컸다. 물론 며칠 가지 못할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란 그렇게 얄팍한 흉내로는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저자는 "누군가를 매일 만나다 보면 나만이 아는 그 사람의 모습이 생기는 것처럼 매일 같은 풍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어쩌다 한번 그 장소에 오는 사람들은 모르는 수많은 인상들을 알게 된다."(286p) 라고 했지만, 누구나 주변의 풍경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은 아니며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도 가 닿지 못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선과 끈기를 가진 사람은 전 삶을 통틀어 나와 얼마나 다른 것을 보고 느끼며 살고 있을까?


ps. 라야님이 집을 얻게 된다면, 굉장히 독특한 이유로 남들은 택하지 않는 집을 선택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봤다.


(2015.11.18)




2. <시작하는 공공> 00그라운드 기획단, 2015

제작자 홈페이지: https://gonggong00.wordpress.com/


   누군가의 RT를 통해 "큐브'의 '씬'은 가능한가?"라는 라운드테이블 녹취록을 읽었다. 이 대담을 기획한 00그라운드와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라는 단체도 알게 되었다. 관심 있는 독립출판 씬에 대한 흥미로운 대담과 이슈를 읽어나가면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곳에서 왜 독립문화의 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 걸까?'라는 질문이 생겼지만 이어지는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하거나 웹에 게시되는 다음 행사의 녹취를 읽어보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딱 그 정도로만 반응하는 게으른 개인이므로….

   책은 1년 전에 읽었던 대담으로 시작되는데,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흥분이 남아있는 시점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대한 통계치를 면밀히 따져보았을 때 2015년 정도가 위험할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도 합니다." (이로, 54p) 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올해는 아트북페어를 선언하고 일민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기며 2014년의 2배 가까운 관람객이 집계되었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이어진 폭발적인 성장세는 어떤 변인에서 가능했던 것일까 혹은 어떤 통계치가 빠져 생긴 결과일까(아니면 이게 위험한 신호인걸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금'을 이야기하는 '지난' 대담을 읽는 의미를 생각했다. 1년가랑의 시간이 지난 그때와 지금을, 혹은 그때의 맥락과 지금의 맥락을 오가며 읽는 것은 <시작하는 공공>을 읽는 즐거운 독서 방법이었다. (창조경제가 지나간 뒤의 DIY는 어떻게 될까?)

   "DIY 운동은 자율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와 "'개인'을 길러내는 교육"을 순서대로 읽으며 00그라운드와 이런 행사를 기획한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의 의도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더해 독립출판-DIY-정체성-독립과 같은 키워드들이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대담의 맥락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왜 이런 주제를 기본소득이 이야기하는 걸까?'가 아니라, 바로 거기에 의도가 있었구나! (게으른 개인은 깨달음도 늦습니다) 아젠다를 바로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지도를 그려가는 태도에 감명받았다. 나는 어디쯤에서 얼마나 멀리 보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 관심사 위주로 취사선택해서 읽는 개별 행사의 녹취 페이지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기획의 흐름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책으로 엮여 더 좋았다(몇몇 꼭지는 지나치게 느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모두가 던지는 질문 - 기본소득은 가능한가 -에 대한 대답은 물론 없다. 정책적/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제외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당연해 보인다. 다만 '기본소득'을 표면적으로 알던 나 같은 사람에게 기본소득과 연결된 많은 개인적/사회적 이슈가 있음을 깨닫게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미 어떤 '영업'에 성공한 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을 메모장에 적었는데, 한 호흡으로 읽어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구절을 옮겨적고 있어서 자제해야 했다. 갈무리한 구절에 대해서는 더 오래 곱씹고, 생각한 뒤에, 이 책을 읽었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ps. 자간이 지나치게 좁아 반각의 경우 뒷글자와 결합하는 경우도 있고, 온점이나 반점 뒤에 띄어쓰기가 없어 문장이 빽빽하게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분량 문제 때문일까? 혹시 의도한 걸까? 토크의 긴박함이나 시대의 절박함을 표현한 편집이라거나….


(2015.11.26)




3. <FILM TYPOGRAPHY vol.1> 프로파간다 시네마 그래픽스, 2015

제작자 홈페이지: http://propa-ganda.co.kr/


   올 해 '프로파간다'가 단행본을 직접 만들어 참여하신다는 소식에 야광봉을 흔들었다. 책자나 굿즈 작업을 봐 오긴 했지만 온전히 스튜디오 내부의 의도로 엮이는 책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특히 그간의 레터링 작업을 모은 책은, 회사의 자산을 공개하는 셈이기도 해서 깜짝 놀랐다. 단단하고 간결하게 엮인 책을 보면서 그 자체로 아카이빙 될 수 있는 작업을 해 온 스튜디오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싶어 끄덕여졌다.

   다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레터링만 크게 확대할 때 무엇이 보이는가? 거칠게 마무리되거나 흩뿌려진 노이즈가 가장 먼저 보인다면, 점차 다른 디테일이 눈에 들어온다. <해피 플라이트> 레터링 'ㅎ'의 꼭지가 비행기 날개의 모양으로 처리되었다거나, <피에타> 레터링이 세로쓰기 될 때 'ㅔ'의 두 세로획이 각기 앞글자의 'ㅣ'와 뒷글자의 'ㅏ'와 매끈하게 연결되는 형태에 감탄한다. 여러 번 보았던 포스터 속 레터링인데도 '그제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세밀한 눈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레터링과 시각이미지에 대해 잘 모르거나 둔감한 나 같은 사람에게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책일 수 있다. 

   제작 과정을 차례로 보여주는 페이지(<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등)가 있지만 결정된 시안이 다듬어지는 작업을 보여주는 것에 가까우며, 그보다 근본적인 아이디어의 착안과 탐색의 과정은 약간의 설명 아래 감춰져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왜 이런 형태와 배치를 선택했을까?" 질문하며 책을 보게 된다. <그녀의 연기>에서 '녀'와 '연'이 세로로 배치될 때 세로획이 미세하게 정렬되지 않는 것이나 <반짝이는 박수소리>에서 '수', '소'의 가로획 역시 살짝 어긋나게 둔 근거들이 궁금해진다.[각주:1]

   레터링을 보며 가진 의문 중에는 책의 후반부에 있는 포스터를 대조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도 있었다. 이를테면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의 레터링에서 '의'가 정렬 밖으로 빠져나가는데포스터를 보면 정렬에서 돌출된 '의' 아래에 영화 크래딧 정보가 위치하면서 전체적인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계산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밀크>의 두 글자의 균형은 '크' 아래에 있는 작은 영문제목 'MILK'가 아니라면 깨져버렸을 것이다. 처음부터 영문명과 한글명을 묶어 포스터에 함께 표기하기로  후에 디자인한 결과물이 아닐까 역으로 짐작해 본다. 네임펜으로 칠해 가장자리가 번져 뭉툭해진듯한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의 레터링이 의아했지만, 포스터에는 물결치는 타이틀 위아래로 텍스트가 유기적으로 더해지고, 메인 카피도 거칠게 그려낸 효과로 얹어지면서 전체적인 인상을 계획해 선택된 작업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레터링 페이지만 유심히 보는 것은 작업의(혹은 책의) 한 면만 보게 되는 셈이다. 이를테면 <산다>의 흑백 레터링과 최종 포스터에 실린 레터링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다 보긴 했지만, 내가 얼마나 '읽어냈는'지는 자신이 없다. 앞선 나의 짐작과 생각이 모두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거다.그러므로 옆에 두고 여러 번 훔쳐볼 책, 그리고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을 보일 책이다. 너무나 귀한 자료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ps.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제목에 'vol.1'이 붙어있다는 것이다ㅎㅎ


(2015.12.22)





  1. 글을 작성하고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더 자세히 보았다. <그녀의 연기>에서 '연'은 '녀'에 비해 (왼쪽뿐만이 아니라) 오른쪽도 조금 더 크고, '의'에 비해 '기'의 왼쪽도 짧다. 전체적인 균형을 고려하며 미세하게 조절한 결과물에서 'ㅕ'의 세로획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한편 <반짝이는 박수소리>는 'ㅜ'와 'ㅗ'가 붙어보이지 않도록, 획의 두께만큼 어긋내 배치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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