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가 행사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화장실을 오가는 사이, 오픈하기 전 다른 부스를 빠르게 둘러보는 순간을 제외하면 60x120cm의 책상 뒤에서 그 부스가 가지고 온 책에 한정한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관객이나 기획자, 혹은 스탭으로 행사 전체를 경험하게 된다면 어떤 인상과 느낌을 받을지 늘 궁금합니다. 그렇기에 참가자 개인으로서, 그중에서도 [딴짓의 세상]이라는 부스로서 제가 가져간 책을 통해 느낀 행사의 후기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굳이 서두에 적어둡니다.)



#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서울 아트 북 페어'라는 부제가 붙으면서 일민 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기고 '포스터 온리'라는 사전행사가 이틀간 더해졌습니다. 큰 변화들로 인해 상징적으로나 피부로 와 닿는 공간의 인상으로나 완전히 다른 행사처럼 느껴졌습니다. 관객에게는 이런 변화가 얼마나 와 닿았을지, 그리고 '아트 북 페어'라는 부제에 얼마나 납득할지 궁금했습니다.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부제가 '서울 아트 북 페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딴짓의 세상]에서 만든 책은 아트북이라는 표현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먼저 했고, 그렇다면 기존의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독립출판'과 '아트북'의 비율이랄까요 -물론 그 합은 100%를 넘길 수도 있겠습니다 - 각 개인이 아트북이라고 분류하는 쪽의 비중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증가할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아트 북 페어'이므로 나는 올해 부스 선정에서 탈락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트 북 페어'가 선정의 기준이라면 당연한 것 같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가 확정 메일을 받은 뒤에는 이 페어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트북이 0-60이고 독립출판이 60-100일 때 나는 아트북으로부터 80 정도 떨어진 독립출판팀인 것 같아... 뭐 이런 생각들 말입니다.


# 중앙 카드결제가 폐지되어 각 부스의 자체 결제로 전환된 것은 행사의 성격과 별개로 큰 변화였습니다. 행사 전날 작년의 판매량을 토대로 열심히 포장하다가 문득 '중앙카드결제 폐지'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를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모두의 지갑이 얇아지는 시대에 현금화할 수 있는 한정된 예산은 행사를 대하는 자세를 크게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접하기 힘든 외국팀, 반드시 사야 하는 대형부스와 한정상품, 그리고 최애 작가를 지나고 난 뒤에도.. 과연 [딴짓의 세상]에게 관심(과 예산)이 돌아올 수 있을까?

 올해는 부스가 1층에 있어서 입장하는 순간의 관객을 볼 수 있었는데, 입장 시 나누어주는 배치도를 유심히 살피면서 가야 하는 곳을 체크하는 관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입장하자마자 한정판매 부스 내지는 최애 부스로 돌진하는 것은 늘 있었던 일이지만, 올해는 굳이 다 보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접은 채 계획했던 부스를 선택적으로 방문하겠다는 자세가 주를 이룬 것 같았습니다. 주최 측 유어마인드의 이로님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참가 작가들의 인지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높아지기에, 기성 출판의 끄트머리로 여겨졌던 독립출판의 수준이 더 올라가거나 겹치면서 역전되는 현상"(기사링크)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제작자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씬의 입장에서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몰랐던 제작자가 발견될 여지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는 점에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고 싶은 부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규모의 행사, 혹은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행사에서 나는(혹은 덜 알려진 부스는) 어떤 의미일까. (부스 앞에 선 채로 배치도를 들여다보는 관객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습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어 여기도 봐 주세요...)

 이런 현상이 개별의 책에도 영향을 준다면, 충분히 인지도가 있는 부스의 신간이나 사전에 SNS 등을 통해 화제를 일으킨 책이 아닐 경우 행사에서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이벤트가 예전만큼의 임팩트를 가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YOUR) SUMMER>의 경우, 저작권 조율과 처음 해 보는 후가공에 대한 우려 때문에 SNS를 통한 홍보가 행사 직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내년에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행사에서는 제작자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사전 홍보를 충분히 하는 것이 올해보다 더 중요해질지도 모릅니다.


# 이번 행사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카드결제가 불가능한 부스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계좌이체를 요청하는 모습은 스마트폰 시대에 가능한 직거래 같아서 귀여웠습니다. 제작자가 구매자에게 자신의 계좌번호를 불러주는 풍경이라니 이렇게 사적인 접촉이 있을까. 한편 카드결제가 가능하냐고 물어보는 관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중앙 카드결제 폐지로 인한 영향도 체감되지 않는 편이었는데, 행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입장객의 경우 작년 8,000명에서 올해 13,000명) 신용카드 폐지로 인한 개별 관객의 예산 한계가 상쇄된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장과 동시에 두꺼운 도록을 서너 권씩 들고 손이 부족해 어쩔 줄 모르는 관객분들의 모습도 올해의 진풍경이었습니다. 사전에 공지된 바 없이 일민 미술관 전시 도록이 무료로 배포되어 놀랐는데, 고가의 훌륭한 도록을 쓸어담은 뒤에 매대의 책이 눈에 들어올까 싶어 우려되었습니다. 일민도록을 무료배포한다니 이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 저도 제가 좋아했던 전시 <청.소.년>의 도록을 득하고 몹시 기뻐하긴 했습니다만...ㅎㅎ 그러고 보면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진정한 승자는 일민미술관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 행사의 규모가 배 이상으로 확장되면서 예전보다 행사의 디테일이 유난히 늦거나 덜 알려지는 것 같아 걱정이 들었습니다. 올해 몇몇 큰 행사들이 운영상의 문제점을 노출했고 그걸 모두가 학습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포스터 온리'와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부스 배치도 및 프로그램에 대한 소식이 행사 전주까지도 올라오지 않아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사전 행사인 '포스터 온리'가 깔끔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안심했습니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행사장의 인원을 통제하는 전시형 마켓의 운영은 필연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대부분이 새로운 환경에서 기획된 프로그램임에도 매끄럽게 진행되어 개인적으로 감탄했습니다. 한편 특별 프로그램 리스트는 오늘까지도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되지 않았는데, 주최측에서 특별프로그램이 본 행사의 뒤로 물러나 있기를 의도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인지 올해는 특별 프로그램에 대한 후기와 이야기가 유난히 보이지 않습니다)

 행사 전날 일민미술관에 책을 미리 가져다 놓으면서 둘러본 행사장의 규모에 '쫄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유어마인드라는 작은 서점 (더 좁혀서 이로님 개인의) 노하우와 인맥으로 가능할 거라고 짐작한 최대치 이상으로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서점 혹은 개인을 뛰어넘는 행사의 규모와 운영의 노하우는 감탄할 일이지만, 그런 맥락을 모르는 일반적인 관객에게는 행사의 규모가 곧 주최 측의 규모로 인식되기 쉬울 겁니다. 그건 여러모로 이상적인 형태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이로님이 갑자기 쓰러지신다거나(사실 쓰러지지 않는 것이 놀랍습니다) 유어마인드의 규모로 감당할 수 없는 스케일을 기대받을 때, 그 일은 누가-어떻게-(또는) 왜 감당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작업에 대한 관심이 식게 된다면 이 페어를 떠나게 될 텐데, 행사의 부피를 키우는 데만 일조하다가 빠져나가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행사를 준비하면서 '매출'에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 판매 마켓이라는 특성상 판매는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만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 이후에 그동안은 잘 몰랐던 다른 팀의 매출을 공공연하게 들으면서 ("몇백 부 이상을 판매하는 팀도 있다" "얼마의 매출을 올린다") 행사에서 제작자끼리 별 의미 없이 주고받는 "많이 파셨어요?"라는 인사에 쉽게 대답하기 어려워 머뭇거리곤 했습니다. 원래는 30권을 팔아도 많이 팔았다고 만족했으나 이제 매출의 범위를 알게 된 이상 대답하기 곤란해졌달까요.

 행사 첫날 어떤 제작자와 "<훈련용수첩>은 재미있게 들춰보지만 사지 않아요." 하는 식의 농담을 하다가 이 책의 목적이 많이 팔려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빠르게 많이 판매될 내용과 전략의 책이 아닌 데다가, 그런 알고 만든 책인데도 흥행에 머뭇거리는 나의 모순이 얄팍해 보였습니다. 가능한 규모의 작업을 판매하며 작업을 좋아해 주시는 분과 만나는 것에 기쁨과 의미를 가졌던 것이 3, 4회 참여가 반복되며 바랜 것이 아닐까,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 여러 가지 면에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는 나, 그리고 [딴진의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행사였습니다. 아트북도 아니고, 신선함을 주는 새로운 참가팀도 아니고, 독립출판에서 으레 기대하는 재기발랄함과도 거리가 있는 이 작업은 관람객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기대하며 얻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어쩌면 진작 했어야 하는 생각들...

 예전에 이로님과 "도쿄 아트 북 페어"의 독특한 부스 이야기를 하면서, 포스터 한 장을 걸어두고 아무것도 판매하거나 홍보하지 않은 채 개인 작업을 하는 식의 파격적인 부스[각주:1]가 등장할 수 있을까 즐겁게 상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조금 과장된 예일지는 모르겠으나, 행사의 의도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작업이 보이는 방식과 방향을 점검하고 각을 세우는 태도는 휩쓸리기 쉬운 마켓 형태의 전시에서 여러모로 필요한 것 같습니다.


폭주하듯 미룰 수 없는 마감에 맞춰 작업하고, 이틀간 현장의 흥분이 폭발하고 나면 갑자기 모든 것이 싹 사라져 한동안 멍하게 지내곤 합니다.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다는 기운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마치고 다른 작업자를 만나 각자가 느꼈던 행사의 인상이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책에 집중한 고민과 행사에 대한 생각을 들으면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처음 가졌던 교류의 즐거움이 충족되는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물론 이번 행사에서도 부스에 와 주신 관객분과 인사하며 느꼈던 즐거움이지만, 여러가지 잡생각에 다소 가려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내년에는 이런 즐거움을 행사장 내부로 가져가서 이틀간의 부스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제작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유체이탈 화법을 쓰고 있네요. 그런 제작자가 되도록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구입한 책에 대한 감상을 별도의 포스트(링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 행사 후기는 여기(4회, 5회, 6회)에서.


* [딴짓의 세상]은 1층 중앙 33번 부스에서 <경상도 사투리 학습서>를 만든 [Kitschland] 와 함께 연합으로 참여했습니다. <THE SUMMER> 특별판 <(YOUR) SUMMER>를 처음 선보였고, 3호 파수꾼 편과 1호 월플라워 편에 일러스트를 그려주신 신모래님 의 'Living Room Routine' 특별포스터도 함께 판매했습니다.(1호와 2호도 열람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작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처음 판매했던 <ICELAND TRAVEL> 합본호와 엽서, 그리고 합본 작업을 하며 있었던 경험에 대한 두 권의 소책자도 소개했습니다. 사적인 기록을 책으로 엮은 <훈련용수첩>과 그 원본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으로, 오래간만에, 이제서야, 드디어 만난 분 모두 반가웠습니다. 특히 <(YOUR) SUMMER>의 기고자분과 제작 과정에서 연락을 드렸던 영화사 관계자분을 직접 뵙고 인사드려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해마다 더욱더 멋진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기획하고 만들어주시는 유어마인드 와 스탭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1. 이로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뒤섞인 듯 합니다. 언급한 형태의 부스는 실제로 일본 <디자인 페스타>에서 있었던 부스이며, 도쿄아트북페어TABF에서 보셨던 독특한 부스로는 부스비를 내고 (테이블 배정을 거부한 채) 복도에 부스를 차린 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스에 대해서는 유어마인드 블로그에 올라온 "2014 도쿄아트북페어 참가 기록" 포스팅에서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yourmind-bookshop.com/archives/502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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