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은 그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기 적당한 시기가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소설 [데미안]은 적절한 시기에 왔고 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렇지 못했다. (두 작품 모두 고등학교 시기에 만났다.) 이런 관점을 성장영화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두 시기에 만났다. 한번은 초등학생 때었다. 학기 말에 수업 진도가 다 끝난 뒤 교실에서 본 것 같은데 영화가 슬펐고 학교란 답답한 곳이구나 정도의 감흥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두 번째 관람은 대학원 1학기 기숙사 방에서였다. 그렇게 두 번의 관람은 영화 속의 인물과 내가 같은 나이와 눈높이에서 강하게 공명할 수 있는, 고교 시절을 모두 피해서 찾아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의 위험함을 알고 있다. 괴로웠던 시간이 성취의 근거로 그려질 때 ‘그때가 좋았지’라는 맥없는 이야기로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한없이 어둡고 힘들었던 시간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해 보자면, 나는 심화된 수학, 과학을 가르치는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나왔다. 모두가 학업에 욕심이 있는 우수한 학생들이지만 1등부터 꼴등이 메겨질 수밖에 없었고, 함께 기숙사에서 살면서 인생의 친구들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들로부터 상처도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감정과 상황이 한꺼번에 가능했다는 걸 지금에 와서 깨달으면서 새삼 놀라기도 한다. 나는 그 치열한 학교에서 하위권을 맴돌면서 수학 과학보다는 영화와 미술을 좋아하는 열등생이었고, 그러면서도 자를 대고서야 서문을 찢어낼 수 있는 제도권 내의 학생이었다.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봤더라면 어땠을까. 영화가 나와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과도하게 이입하고 혼자 저만치 달려갔을 것 같다. 실제로 나의 고교생활의 많은 면이 영화 속 웰튼 아카데미의 그것과 닮아 있었으므로. 키팅 선생님의 말 하나하나가 나를 향하는 것 같아서 시인 혹은 예술을 하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고 순식간에 뜨거워졌다가 재능과 현실, 나태함을 확인하고 또 순식간에 우울해졌을지도 모른다.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제작년에 두 번째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날을 이야기하고 싶다. 시나리오 작성과 관련된 참고도서를 읽다가 예시로 언급된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져서 아무 생각 없이 기숙사에서 영화를 틀었다. 그 날 룸메이트가 방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록 꺼억꺼억 울면서,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있는가 싶어서 당황했다. 


입시를 끝낸 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울었던 까닭은 나의 고교 시절과 영화를 겹쳐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영화가 생생하게 그려낸 성장의 한 순간과 강렬한 감정들로 인해 오히려 ‘청소년기에 맞는, 청소년을 위한’ 영화로 오해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의 주제는 청소년기에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마음을 계속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좌절과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도 책상 위에 올라설 수 있는가 까지 나아간다. 심지어, 그런 메세지를 던지는 키팅 선생마저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서는 그 나름대로 성장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돌이켜보면 나에게 <죽은 시인의 사회>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찾아온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더 적절한 시기에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다 잊어버렸을 때, 영화는 한 번 더 공명한다. 그래서 당신이 청소년인지 중년인지, 얼마나 짧고 긴 삶을 살았던지와 관계없이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권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이 글은 <THE SUMMER> 02 "죽은 시인의 사회" 편에 실렸으며, 로빈 윌리엄스 추모 2주기를 맞아 포스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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