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MMER> 4호를 작업하다가 별생각 없이 지금까지 팬진이 다룬, 그리고 다룰 영화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영화가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성장영화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간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즘 이슈를 접해왔던지라 이제서야 이런 관점으로 전체 영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2013년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팬진에서 다룰 영화를 모두 정해두었는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장영화 중에 소개하는 순서에 따라 느슨하게 확장될 주제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었다. 거기에 남성/여성 주인공에 대한, 혹은 남성중심/여성중심의 서사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랜덤한 선택이라는 변명이 아니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골라낸 영화의 리스트에서 명백하게 보이는 편향을 작동시킨 이면의 문제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되었다.



여성 성장영화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면서 한편 거짓말이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진단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만들어지는 성장영화는 <파수꾼>(2010)의 성취 이후 또래 남자아이들이 잔뜩 몰려나와 관계의 폭력성과 내면을 탐구하는 영화들로 규격화된 것 같다. 성장영화로 특징짓지 않더라도, 여성(제작자 혹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근거로 '손에 꼽을만한 여성 성장영화가 없었어요.'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여성 성장영화를 아예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정체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게으른 리스트임이 분명하지만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1999), <고양이를 부탁해>(2001), <린다 린다 린다>(2005), <청춘의 증언>(2014) 같은 여성 성장영화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THE SUMMER>는 <월플라워> 대신에 <린다 린다 린다>를, <파수꾼> 대신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다룰 수 있었던 것 아닐까?


팬진을 소개할 때 덧붙이는 말이 있다'가 모든 성장영화를 본 것도 아니고, 더 좋은 영화임에도 저에게 다가온 시기가 어긋난 영화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개인적인 환경에서 개인의 선호로 이루어진 리스트는 처음부터 대표성 혹은 객관성이라는 것이 부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건 담론을 다루는 잡지가 아니라 애정을 고백하는 팬진이니까요.' <린다 린다 린다> 대신에 <파수꾼>을 선택한 것은 영화 관람의 시기와 개인적인 취향의 결과일 뿐 다른 의도나 편견이 작용한 건 아니라는 변명으로도 읽힌다. 주관성과 개인적인 선택을 계속 내세운 것은 '니가 뭔데'라는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 개봉 이후, 레이라는 걸출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시리즈에 일부 남성 관객의 항의가 있었다는 트윗을 봤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 멍청이에 대한 비난과 함께, 평생 남성 중심의 서사가 중심인 세상에서 무리 없이 주인공에 이입했던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도 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다 있군.' 하며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보냈던 이슈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파수꾼> 중에 <파수꾼>을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 가깝게 느끼고 선호하게 된 것에는, 내가 남자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필터로 주인공의 이야기에 더 쉽게 이입했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여성이 여성인물의 디테일에 공감하기 쉽고, 남성 역시 같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여성이 남성중심의 영화에도 이입할 동안 나는 얼마나 편안하게 동성의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에 이입해왔는지, 지금까지는 인식도 하지 못해왔다.


사실 누구도 '<THE SUMMER>에는 왜 여성 성장영화가 없나요?'라고 질문한 적은 없고, 영향력 있는 작업도 '전혀' 아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이슈를 배워나가면서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성장)영화의 제작이 어려운 산업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감상에서 선호를 부여할 때조차 남성이라는 위치가 가지는 차별이 작용될지도 모른다는 질문이 스스로에게 던져질 때 나는 이 질문을 어떤 결론에 매어둘 수 있을 때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지금 결론을 내릴 지점까지 가지 못했다. 글의 끝자락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이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5호는 처음 결정했던 영화로 진행할 것 같다. 성장영화 중에 5호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를 이야기하는 여성 성장영화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이해를 받을지 비난을 받을지는 5호를 읽는 사람의 몫이고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아래와 같은 흐릿한 말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THE SUMMER>로 드러난 나의 취향은 이 정도뿐이다. 그 안에는 나의 단점과 한계도 있고, 그걸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내 마흔, 혹은 쉰이 될 때 갱신될 영화 리스트에는 여성이 제작한/여성 캐릭터의 성장영화가 더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 바람에는 여성이 주도적인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런 영화를 혹여나 내가 가지고 있을 성별에 안주하지 않고 감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모두 담겨있다.





PS. 시의적절하게도, 영화 속 여성캐릭터를 탐구하는 <Second Magazine>(링크)이 발간되어 반가웠. 좁고 특정한 이수로 파고드는 기획이 멋지고, 배우고 싶은 지점을 계속 건드려주는 매체가 나왔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냈다. 즐겁게 읽으며 (일면식도 없지만) 응원하고 있다. 여러 매체와 방법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출간한 > THE SUMM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Our beautiful dark twisted school days  (0) 2016.08.11
<THE SUMMER> 04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  (6) 2016.06.10
<(YOUR) SUMMER> 특별판  (12) 2015.11.03
<THE SUMMER> 03 파수꾼 Bleak Night  (18) 2015.06.19
Your Summer Archive Project  (0) 2014.12.23
: